
"사람 하나에 사연 하나" 노숙인과 9년 만난 공무원
기재일 서울시 주무관…"기관 편의만 생각한 법 개정돼야"
(서울=연합뉴스) 이정현 기자 = "방수작업을 했는데 5만원 밖에 못 받았다고 노숙인들이 펄펄 뛰면 일반 공무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해요. 전 아버지가 방수작업을 할 때마다 온몸에 시멘트가 튀어서 왔던 게 생각나 목욕비조차 포함되지 않은 부당한 임금인 걸 알죠."
노숙인 업무만 9년째 해온 서울시 자활지원과의 기재일(46) 주무관.
기 주무관은 29일 인터뷰에서 격무부서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설명은 잘 안 되지만 이 일이 재밌다"며 어린 시절을 풀어놨다.
기 주무관의 아버지는 30년을 미장이로 살았으며 가족은 달동네와 셋방을 전전했다. 그 역시 대학 때부터 비정규직을 돌다 어렵게 공무원이 됐다.
기 주무관은 "공무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노가다' 용어도 바로 알다 보니 분쟁을 자주 조정하게 되고, 업무가 점점 늘어 결국 9년이 됐다"고 말했다.
지겨울 때가 한참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이 일이 "사람 하나에 사연 하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랑스러운 일보다 부끄러운 일을 먼저 털어놨다.
하루는 배가 부를 대로 부어오른 30대 노숙인이 기 주무관을 찾아왔다. 간경화 말기였다. 배에는 복수를 빼낸 자국이 가득했다.
간 이식 말고는 방법이 없어 요양시설을 권했지만 그는 임시방편의 치료만 고집했다. 입에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기 주무관은 미래를 포기한 청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움과 화가 동시에 일었다고 했다. 그는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내년에도 살아서 이렇게 부탁하러 올 수 있는지 보자'고 소리친 게 아직 생각난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경력이 쌓이면서부터는 보람된 일도 늘었다.
기 주무관은 일자리를 찾으러 온 한 노숙인에게 생선가게를 청소하는 일을 알선했다. 초여름인데다 지독한 냄새로 모두가 꺼리는 일이었다.
기 주무관은 "아예 가지 않거나 하루 이틀하고 관둘 거라 생각했지만 연말에 계약기간이 끝났다며 다시 일자리를 달라고 찾아왔다. 계속 그 일을 했던 것"이라며 "몸은 더 힘들어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일을 찾아줬다"고 말했다.
3년 후 그 노숙인은 '술 한 잔 안 사고 저축하는 짠돌이'로 소문이 나있었다.
이렇듯 매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는 기 주무관이지만 때로는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 때도 있다고 한다.
기 주무관은 "2011년 영등포역에서 방화셔터에 끼어 숨진 노숙인 2명이 여러 언론에 보도됐지만 그들을 버렸던 가족이 조용히 찾아와 보상금을 받아간 건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한 노숙인이 일하다 사고로 죽자 고급 정장을 빼입고 나타나 보상금을 주지 않으면 서울광장에서 시위하겠다고 협박한 가족들, 노숙으로 병든 여동생의 수술 동의서를 받으려 연락하니 5분 만에 팩스로 친권포기각서를 보낸 사회지도층 인사….
그는 "노숙인들이 과연 그들만의 잘못으로 그렇게 됐을까"라고 반문했다.
기 주무관은 현장에서 느끼는 노숙인복지법의 허점도 가감 없이 지적했다.
기 주무관은 "현행 법은 시설 종사자들을 잠재적인 인권침해자로 규정한다"며 "어느 복지법에도 시설 종사자에게 인권감수성 교육을 강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다 보니 시설에선 규율과 질서가 필요할 때도 있는데 복지사 스스로 지나치게 몸을 사리게 되고 되레 피해를 볼 때도 이들을 보호해줄 장치는 없어 자괴감에 빠진다"고 덧붙였다.
기 주무관은 기관 편의주의로 이원화된 법령 내용도 문제라고 봤다.
기 주무관은 "국가는 기존에 지원했던 계층만 지원하려 해 지자체가 별도의 의료급여 체계를 만들다 보니 노숙인들이 소수 병원에서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며 "국가 관리 시설과 시 관리 시설 간 정보 교류도 전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법을 만들 때 노숙인 유형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나눠 규정했어야 했는데 미국의 법을 고민 없이 그대로 따와서 생긴 일"이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서울 노숙인이 어디에 몇 명씩 분포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노숙인지원법 제2조는 법 적용대상을 '노숙인 등'이라고 규정했지만 '등'에는 쪽방촌 주민만 속한다"며 "그렇다면 반 평 고시원에 사는 사람은 빠진다. 쪽방촌이나 고시원이나 살기 적합하지 않은 공간인 건 똑같지 않냐"고 말했다.
그는 "단순히 법이 규정한 노숙인의 숫자를 묻는다면 답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노숙과 다름 없이 생활하는 사람을 포함한다면 절대 셀 수 없다"며 "그 사실은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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