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의 꽃제비 北청년, 탈북 11년만에 英유학길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4-06 05: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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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조국에 이바지할 외교 전문가가 꿈" 김성렬씨
△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탈북 11년만에 영국 유학길에 오르는 김성렬(30)씨가 셰필드대학 입학허가서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2015.4.6 2vs2@yna.co.kr

까막눈의 꽃제비 北청년, 탈북 11년만에 英유학길

"통일 조국에 이바지할 외교 전문가가 꿈" 김성렬씨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북한 함경북도 청진 출신인 김성렬(30)씨는 영국 셰필드대 국제관계학 대학원 입학허가서를 들고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입학허가서를 받아 올가을 3년 예정의 유학길에 오르는 김씨가 지난 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인생역정은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씨는 1990년대 식량난에 떠밀려 음식을 구걸하며 방랑하는 북한 청소년을 뜻하는 '꽃제비' 생활을 했다.

1주일 동안 오직 물만 먹고 지낼 때에는 '이러다간 굶어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떠나서 죽겠다고 결심했죠."

1997년 3월 김씨는 가족과 함께 살얼음이 언 두만강을 건너 첫 탈북을 감행했다.

중국 옌볜(延邊)과 허베이(河北)성을 떠돌아다니며 노동 착취를 당하던 김씨는 3년 만에 공안에 붙잡혀 북송돼 공개처형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 더 탈북을 시도한 김씨는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중국 톈진(天津) 국수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어 중국 땅에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일단 육체적인 곤궁에서 벗어나자 정신적인 목마름이 끓어 올랐다.

"배우지 못해 글을 못 읽었어요. 미래가 보이지 않던 어느 날 밤 라디오를 틀어 이리저리 주파수를 맞추다 보니 한국 라디오가 잡힌 거예요. '한국에 오면 탈북자에게 교육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었는데 '아! 이거다' 싶었던 거죠."

탈북 시도 7년 만인 2004년 9월 김씨는 19살의 나이로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입국 후 김씨는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 듯 공부에만 매진하며 지식을 흡수했다. 불과 1년 3개월 만에 초·중·고 검정고시를 통과했고, 2007년에는 한동대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대학 교정에 섰을 때 김씨는 두려운 감정이 앞섰다고 했다. 바로 영어 탓이었다.

"첫 수업에서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는데 전 아무런 답변을 못했죠. 다른 학생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도살장에 끌려온 처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김씨는 1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서는 영어에 매달렸다.

간절함이 통했는지 운 좋게 2009년부터 한 종교단체의 후원으로 미국 등지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2013년에는 파고다아카데미와 우양재단이 개최한 탈북청년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의 영예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영어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김씨는 점차 미래에 대한 꿈을 구체화했다.

통일 뒤 남북뿐 아니라 동북아를 아우르는 전문가로 성장해 북한에 있는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글로벌 인재로 양성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는 김씨.

이를 위해 국제기구에 들어가 정책을 입안하는 등 실무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김씨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유학을 준비했다.

김씨는 지난달 영국 글래스고우대학과 셰필드대학의 입학허가서를 받았고, 국제관계학 권위자가 많은 셰필드대학을 선택했다.

입학을 앞둔 김씨에게 남은 걱정은 경제적인 문제다. 1년에 4천800만원에 달하는 학비와 생활비를 당장 마련할 수 없어 후원자를 구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라 유학비 대출도 알아보고 있다.

새로운 출발점에서 선 김씨는 그동안 막다른 길에서 새로운 길을 뚫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작정이다.

"유엔본부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경험을 쌓아 통일 조국에 이바지하는 외교 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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