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를 죽이려 했던 신학자의 삶…독일언론 조명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4-09 19:5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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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사망 70주기 맞아

히틀러를 죽이려 했던 신학자의 삶…독일언론 조명

디트리히 본회퍼 사망 70주기 맞아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마지막 순간이다. 그러나 내게는 시작일뿐이다."

천재 신학자로, 그리고 나치 타도의 투사로서 삶을 불태운 39세 디트리히 본회퍼 루터교회 목사는 이르디 이른 생의 마감을 시작으로 규정하며 담담하게 맞았다.

9일(현지시간) 본회퍼 사망 70주기를 맞아 독일 언론이 일제히 그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그는 악마 같은 권력을 휘두른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혐의로 1943년 4월 붙잡히고 나서 2년여가 지난 1945년 4월 9일 교수형을 당했다.

히틀러가 그로부터 3주 후 자살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독일 제1 공영 ARD 방송의 메인뉴스 타게스샤우는 8일 인터넷판에 "어둠 속의 빛처럼"이란 성서적 표현을 빌린 제목의 기사를 올려 본회퍼 사망 70주기를 기념했다.

시사잡지 포쿠스 온라인은 '기독교 순교자'라고 그를 그렸고, 주간지 차이트 온라인은 그의 깊은 신앙심은 정치적 행동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음을 기술했다.

주간 슈테른 역시 '투사 그리고 신학'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저항은 실패했지만, 도덕적으로 승리한 것"이라며 "본회퍼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저항의 부활'로, 베를리너차이퉁은 '용감한 인물에 대한 기억'으로 본회퍼의 족적을 되짚었다.

이날 수도 베를린과 바이에른주 등지에선 사망 70주기를 기념하고 그의 종교적 신념과 실천을 기억하는 예배 등 각종 행사가 열렸다.

본회퍼는 1906년 2월 지금은 폴란드 지역인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정신과 의사 칼 본회퍼 부부의 여덟 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일찌감치 신학에 뜻을 두고 학업에 매진한 끝에 1927년 박사 학위를 얻었다. 내쳐 1930년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이듬해에는 목사 안수도 받는다.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전기에 따르면 본회퍼는 진보 신학의 명문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백인들에게서 극심한 인종차별을 받는 흑인의 삶에서 민중들과 함께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다.

'아래로부터의 관점'이니 '타자를 위한 교회' 같은 그의 신념은 깊은 공부와 진실한 실천으로 한층 공고해 지면서 독일의 나치식 국가교회주의를 배격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고백교회 운동으로 나타났다.

본회퍼는 진실을 말하는 공동체와 책임 있는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숱한 통찰적 언명으로도 유명했다.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에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르고 유족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일부에선 이를 두고 그의 신학적 태도를 신학적 정치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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