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행진' 생존자 獨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70돌 기념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4-12 19: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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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행진' 생존자 獨부헨발트 수용소 해방 70돌 기념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나치 정권이 자행한 홀로코스트 생존자 약 80명이 부헨발트 강제 집단수용소에 모여 이 수용소 해방 70돌을 기념했다고 현지 언론이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튀링겐주 에어프르트시 인근에 자리한 부헨발트 수용소는 1945년 4월 11일 미군의 독일 진주와 함께 해방됐다.

나치 집단수용소 연구 문헌과 과거 자료를 보면 폴란드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숱한 나치 정권의 수용소 가운데 부헨발트는 독일 안에 있었던 최대 규모의 폭압 기제였다. 나치 대학살의 표적이었던 유대인뿐 아니라 나치 반대 세력, 나치가 주장한 반사회적 인사, 소련군 포로, 집시 등 모두 25만 명 이상이 이곳에 갇혀 지냈다.

1937년 7월 가동되기 시작한 부헨발트에서 나치 전체주의의 만행과 강제 노동, 굶주림과 질병에 죽어나간 이들은 약 5만 6천 명을 헤아린다. 단 2만 1천 명만이 살아남아 해방을 맞았지만, 이후 자유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또 다른 삶의 지속이 지운 부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을 택한 이들도 많았다.

부헨발트 수용소는 2차 세계대전 말기 다른 수용소들에서 생존한 이들이 강제로 옮겨진 '수용소 중 수용소'로도 기능했다. 전쟁 말 패색이 짙어진 나치 정권이 강행한 참혹한 수용소 이동 행군은 '죽음의 행진'으로도 표현됐다.

수용소 생존자로 기념행사에 참석한 헨리 오스터(86)는 AP 통신에 "수용 막사마다 시신 더미가 쌓였다"며 당시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는 쾰른에서 태어난 유대계로 1941년 폴란드 게토에 이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거쳐 부헨발트로 왔다. 아우슈비츠로 옮겨진 날에는 기아로 아버지를 잃고 가스실 고문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오스터는 바로 그런 인간성 말살과 참상을 겪은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다.

몇몇 유럽 국가 외에 이스라엘, 호주,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참석한 생존자와 미군 전역자 3명 등은 이날 수용소가 있던 곳에서 1분간 묵상하고 헌화하는 것으로 그날의 기억을 더듬고 바이마르 국립국장에서 열린 기념행사에도 참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한편, 당시 미군의 진주로 부헨발트 외에 베르겐-벨젠, 라벤스브뤼크, 다하우 수용소 등이 함께 해방됐다고 dpa 통신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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