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적을 더는 적으로 보지않는 적극 다자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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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4월 북베트남군의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함락 직전 미국 대사관의 철수 모습.(AP=연합뉴스 자료사진) |
<베트남 종전40년> 동남아 빈국에서 대표국가로 급부상
1986년 '도이 머이' 정책 도입으로 고성장 누려
과거의 적을 더는 적으로 보지않는 적극 다자외교
(하노이=연합뉴스) 김문성 특파원 =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가 지금은 대표 신흥국가로 떠오르며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는 중국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30일이면 남북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맞은 지 40주년이 되는 베트남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다.
1975년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을 붕괴시키며 통일을 이뤘지만, 미국에 의존했던 남베트남의 자본주의를 추방하고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부작용과 혼란이 생겼다. 통일 베트남에 대한 서방 진영의 경제 제재는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더욱 어렵게 했다.
결국, 베트남이 선택한 것은 1986년 '도이 머이' 정책의 도입이었다. '새롭게 바꾼다'는 뜻의 도이 머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빗장을 여는 개혁·개방 정책이다. 중국과 옛 소련의 개방 정책을 뒤따라 한 것이다.
베트남에 외국인 투자의 물꼬가 트였고 이에 힘입어 199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5%에 이르는 고성장을 누렸다. 베트남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6.0%로 싱가포르(2.9%)는 물론 한국(3.3%)보다도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젊은 인구 중심의 풍부한 노동력과 중국의 절반 수준도 안 되는 값싼 인건비는 다른 나라에 베트남 투자 붐을 일으켰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업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C&W)는 "베트남의 중위 연령(전체 인구를 나이순으로 볼 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이 30세를 밑돌고 매년 100만∼150만 명이 노동시장에 새로 진입하고 있다"며 "비용 대비 생산성도 높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FDI)는 202억 달러로 26년 만에 무려 50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은 1994년 신발제조업체 태광실업이 베트남에 처음 현지법인을 세운 이후 현재 4천여 개 기업이 진출해 있다. 최근에는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는 한국 등 외국 기업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후 2001년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 2009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며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교류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한 한국인은 84만7천958명, 한국을 찾은 베트남인은 14만348명으로 10년 전보다 각각 3.6배, 4.2배 증가했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해 한국으로 이주한 베트남 여성이 5만 명을 넘는다. 베트남의 K팝 팬이 5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등 한류 열기 또한 뜨겁다.
베트남은 과거의 적을 더는 적으로 보지 않는 적극적인 다자외교를 펴고 있다. 이는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모두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한 데서 볼 수 있다.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두 강대국의 다툼 속에서 최대한 실리를 챙기겠다는 것이다.
미국 공공행정아카데미의 테리 F. 부스 연구원은 베트남 일간 뚜오이쩨에 "베트남과 미국이 미래를 지향하며 교역, 안보 등의 분야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베트남은 연내 한·베트남 자유무역협정의 발효,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경제공동체(AEC) 출범 등 역내 외 국가와 협력을 강화해 경제의 과실 바구니를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공직사회의 관료주의, 국제기준과 동떨어진 법규 등이 기업 활동과 경제 활력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꼽힌다. 이에 따라 응웬 떤 중 베트남 총리 등 국가 지도부가 기업환경 개선을 연일 강조하고 있지만, 제도와 의식 개혁이 뒤따르지 않는 한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한국을 비롯한 외국계 경제단체의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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