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총선 D-1, '차기총리' 면면
데이비드 캐머런 vs 에드 밀리밴드
(런던=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 향후 5년간 영국 정부를 이끌 수장 자리를 놓고 보수당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49)와 노동당 에드 밀리밴드 당수(45)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현재 여론조사 결과들에 따르면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출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돼 캐머런 총리와 밀리밴드 당수가 연립정부 또는 정책연대를 통해 새 정부를 꾸릴 것으로 전망된다.
누가 차기 총리가 될지는 누가 연정 구성에 성공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 데이비드 캐머런
2010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제1당 자리에 올려놓고 총리에 올랐다. 당시 43세로 1812년 로드 리버풀 총리 이래 최연소 총리였다.
2005년 마이클 하워드 당수가 총선에서 패배한 뒤 보수당 개혁과 집권을 내걸고 혜성같이 등장해 당수 자리에 올랐다.
재선의원으로서 당원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보수당 수장에 오를 수 있었다.
당권을 잡은 지 5년 만에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 전 총리가 이끈 노동당 집권 13년에 마침표를 찍고 보수당 정부를 출범시켰다.
주식 중개인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귀족학교로 알려진 이튼스쿨을 졸업하고 옥스퍼드대에 입학하는 등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1997년 첫 총선에 나섰다가 낙선하고 2001년 총선에서 옥스퍼드 인근 위트니 선거구에서 출마해 당선했다.
그는 총리에 오른 뒤 노동당 집권 시기 커져 온 재정적자를 낮추기 위한 긴축 정책을 펼쳤다. 당시 유럽은 그리스 재정위기로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집권 초반 대학등록금 상한제를 없애고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최대 3배가량 인상할 수 있는 법안을 강행 처리해 2011년 젊은 층들의 폭동을 맞기도 했다.
또 국민건강보험(NHS)이 자금난을 겪으면서 국민의 불만이 팽배했고 학교 부족과 급식 예산 부족 등을 지적하는 교사들의 비난도 거셌다.
그럼에도 캐머런 총리는 재정적자 축소를 밀어붙여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한편으로는 양적완화를 통한 통화정책 등을 활용해 경제를 무난하게 이끌었다는 게 경제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는 경제계에서 친(親) 기업적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2012년 열린 런던 올림픽 역시 성공적으로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는 캐머런 총리의 최대 정치적 도전이었다.
치밀한 계산 없이 주민투표 실시에 동의해줬다가 영국 연방이 와해할 수도 있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를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캐머런은 유럽연합(EU)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 실시 공약으로 또 다른 도전을 맞고 있다.
애초 EU 권한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EU 협약 개정에 방점을 둔 카드였지만 EU 측이 협약 개정에 완강히 반대하는 탓에 영국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는 셰필드 경의 딸인 사만다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뒀으나 첫째 이반은 뇌성마비와 중증 간질을 앓아오다가 2010년 총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직후 숨졌다.
캐머런 부부는 '다우닝가 10번지(총리관저)'에서 넷째를 낳아 토니 블레어 전 총리에 이어 재임 중 자녀를 얻는 사례를 이어갔다.
◇ 에드 밀리밴드
밀리밴드 당수는 2010년 노동당 당권 경쟁에서 4살 형 데이비드 밀리밴드 전 외무장관을 이기고 당수에 올랐다. 당시 40세의 나이로 최연소 노동당 당수였다.
그는 데이비드와 4라운드까지 접전 끝에 간발의 차이로 당권을 쥐는 데 성공했다.
당시 데이비드 지지자들은 에드 밀리밴드를 재치가 부족하고 순진무구하다는 뜻에서 '포레스트 검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밀리밴드는 당수 수락 연설에서 "신(新) 노동당'의 시대는 끝났다"고 천명해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을 폐기했다.
노동당의 근간인 서민 노동자를 중심에 놓는 정통 노동당의 길을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7세에 노동당원이 된 정통 좌파다. 명실상부한 좌파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 랠프 밀리밴드는 폴란드계 유대인 학자로 "현 세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 학자"로 불린 인물이다.
나치 박해를 피해 1940년대 영국으로 이주해 1960년대 소련식 사회주의를 비판한 '신좌파' 운동을 주도했다.
모친 역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으로 열성적인 인권운동가였다.
형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에드 밀리밴드보다 먼저 노동당에서 촉망받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당권 경쟁에서 동생에게 진 뒤 정계를 떠났다.
일부 보수 언론들은 밀리밴드 이름(Ed)을 빗대 '레드(Red)'로 지칭하기도 한다.또 일부에선 '코미(공산주의자·commie)'로 통하기도 한다.
밀리밴드는 이번 총선에서 '부자 증세, 서민 감세'로 대표되는 노동당 정통 공약을 내놨다.
또한, 밀리밴드가 총리에 오르면 벤저민 디즈레일리(1874~1880) 이후 첫 유대인 총리가 된다.
그러나 한 여론조사는 83%가 밀리밴드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투표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답해 '유대인 총리'가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옥스퍼드대 출신인 밀리밴드는 TV 기자로 일하다가 노동당 연구원으로 옮긴 뒤 고든 브라운 전 총리의 측근으로 합류하면서 정치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브라운 전 총리가 취임한 2007년 그를 내각처 장관에 임명했고 이후 에너지·기후변화장관으로 기용했다.
이후 노동당 소장파로서 노동당의 개혁을 주창하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침체 속에서 기존 노동당 노선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당권을 쥘 수 있었다.
밀리밴드는 재정을 파탄에 빠뜨린 노동당이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재정적자 축소를 약속하며 "책임 있는 정당"을 강조하고 있다. 다만, 재정적자를 줄이려는 구체적 수단은 얼버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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