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서방 2차대전 승전기념일 왜 다르나
"항복문서 베를린서 서명돼야" 스탈린 주장에 시차도 작용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 서방과 러시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서방에선 5월 8일을 2차대전 승전 기념일로 간주하는 데 반해 러시아에선 5월 9일을 승전 기념일로 친다.
이렇게 된 데는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서방 국가들과 힘을 합쳐 나치 독일군에 맞서 싸웠던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고집과 유럽과 러시아 간 시차가 작용했다.
2차 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부터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같은 해 6월 미국·영국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독일군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갔다.
동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한 소련군은 독일에 대한 마지막 공세를 퍼부었다. 베를린 점령을 위한 총공세가 이듬해 4월 중순에 시작됐고 4월 30일 마침내 독일 의회 의사당에 소련 적기가 내걸렸다.
전날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연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 아돌프 히틀러는 이날 에바와 함께 권총 자살했다. 뒤이어 5월 2일 나치군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다.
7일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독일군을 대표해 프랑스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5월 8일 오후 11시(중부유럽시간)부터 모든 군사행동을 중단한다"는 내용의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이를 근거로 서방은 2차 대전 종전일을 5월 8일로 본다.
하지만 전쟁 말기 서방 연합국이 소련을 고립시키려 한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스탈린은 이 항복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서방 연합군이 아닌 소련군이 2차 대전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나치의 심장부는 베를린이기 때문에 항복문서는 베를린의 소련군 점령사령부에서 서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영국도 스탈린의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8일 오후 10시43분(중부유럽시간) 베를린 근교의 소련군 사령부에서 빌헬름 카이텔 독일군 총사령관이 소련군 총사령관 게오르기 주코프 앞에서 항복문서에 다시 서명했다.
유럽과 러시아의 시차 때문에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9일 0시43분이었다. 이날 소련 최고회의(의회에 해당)는 승전을 공식 선언했다. 스탈린은 승전 기념 특별연설을 했다. 그 뒤 소련과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8일이 아닌 9일을 승전일로 기념해 오고 있다.
서로 다른 승전 기념일은 전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소련과 서방 사이의 냉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1995년 승전 50주년 행사 때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서방 정상들은 5월 8일 영국 런던에서 기념식을 한 뒤 다음 날 모스크바에서 또다시 기념행사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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