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대러 정책 노련미·유연성 돋보이는 '투트랙 전략'
과거사 보상엔 거침없이…패권 확장엔 단호하게 대응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대(對) 러시아 정책 줄타기를 해부하자면 3기 연정을 내리 이끄는 그의 정치적 노련미와 이념적 유연성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진보 진영과 야권 세력은 때론 그의 노련미를 교활한 술수로, 유연성을 노회한 책략으로 깎아내리지만, 메르켈 총리를 향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독일 연방의회에선 이러한 그의 색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대비되는 '전술'이 나왔다.
하나는 나치 정권이 일으킨 2차 대전 기간 소련 전쟁포로 생존자들에게 1천만 유로(122억 원)를 보상한다는 결정이요, 다른 하나는 러시아의 주요 8개국(G8) 복귀는 아직 어림없다는 메시지였다.
과거사 직시와 반성을 상징하는 보상 결정은 무엇보다 작은 대가로 큰 상징적 효과를 기대한 측면이 강하다. 생존자 4천 명에게 돌아갈 몫은 2천500 유로에 불과한 만큼 보상금이라기보다는 위로금이라고 해야 맞겠다.
결국, 대연정 소수당 상대인 사회민주당과 진보 야당인 녹색당 등 전통적으로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인 정파의 의견을 흡수하면서도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는 등 현실적 선택을 했다는 평가다. 일본의 과거사 외면에 분노하는 한국을 위시한 국제사회에서 그가 박수를 받는 이유다.
메르켈 총리는 그러나 이날 의회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전개 상황 때문에 내달 바이에른주 엘마우에서 G8이 아니라 러시아가 배제된 G7 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이라며 '오늘의' 러시아와는 각을 세웠다.
이 회의 의장국의 최고지도자로서 그는 자유, 민주주의, 법치를 기본으로 여기는 G7 국가들에 이들 가치는 국제법과 영토보존 존중을 의미한다며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행태는 이들 가치와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작은 경제 부담으로 국제사회에서 독일의 신뢰와 지지를 높이는 과거사 대응은 대응대로 하되, 미국을 위시한 서구의 동진(東進) 방어를 이유로 하는 러시아의 역(逆) 패권 확장도 차단한다는 두 전술인 셈이다.
메르켈 총리는 그러면서도 유럽연합(EU)과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권 6개국의 협력 강화를 위한 'EU-동부파트너십'은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며 러시아를 안심시키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EU-동부파트너십 정상회의는 21일부터 이틀간 EU 순회의장국인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열린다. 우크라이나, 조지아,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등 옛 소련권 6개국이 동부파트너십 해당국이니 러시아가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메르켈 총리의 언급은 EU에 자칫 짐이 될 수 있는 이들 국가와의 섣부른 거리 좁히기를 확인하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러시아의 우려를 식히려는 '립 섭비스'이기도 하다.
메르켈 총리의 이런저런 방책은 모두, EU 중심국으로서 독일의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러시아를 포함한 범유럽의 안정과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는 하나의 전략에 모아진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날 공교롭게도 한국에선 중도좌파 사회민주당 출신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에도 오버랩 되는 독일의 개혁 정치와 통합 정치가 화두에 올랐다.
슈뢰더 전 총리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의 메르켈 총리는 서독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동독에서 성장한 물리학자 출신의 보수 정치인이다.
소련발 탈냉전 대지진이 이어지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1월 9일 직후 뒤늦게 현실정치가로의 성장을 결심한 학자로서 그는 정계 입문 이후에도 서독과 유럽 전역을 뒤흔든 6.8 운동을 재앙으로까지 여기던 우파 이념자였다.
하지만 그는 좌파 정당과의 연정이나 타협 정치를 통해 6.8 학생운동 세력이 피어린 희생을 하며 요구했던 독일사회의 과거사 직시와 청산에 앞장서고, 노동계의 전통적 요구였던 최저임금제를 최초로 도입하는 등 좌클릭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그러나 이번 의회연설에서 독일 연방정보국(BND)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을 도와 유럽 주요국 정부기관 및 기업, EU 집행위원회를 사찰했다는 '도청 스캔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앞서 수차례 언론을 통해 특별히 문제될 게 없으며 필요하면 자신도 의회에서 조사받겠다고 밝힌 마당에 의회 석상에서 이를 거론해 봐야 도움될 게 없다는 판단에 따른 특유의 침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자 야당인 좌파당 그레고어 귀지 원내대표는 즉각, 독일의 EU 국가들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며 메르켈 총리의 태도를 비난했다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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