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트로이카 시조는 고르바초프 아닌 안드로포프"
12일 러시아 '국가주권 선언' 25년…당시 주역들의 회고
(서울=연합뉴스) 지일우 기자 = "소련의 개혁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아니라 유리 안드로포프가 시작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다. 안드로포프가 소비에트연방(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국가원수)일 때 3명을 불렀다. 블라디미르 돌기흐와 니콜라이 리즈코프, 그리고 미하일 고르바초프(중앙당 정치국원)였다. 그러고는 '지금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한번 보라. 모든 방면에서 단호한 개혁(페레스트로이카)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혜를 모아 국가 개혁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1990년 당시 러시아 인민대표대회 대의원으로, 보수강경 공산당원이었던 세르게이 바부린 '러시아 범국민동맹' 총재의 회고다. 바부린은 안드로포프가 구체적으로 언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시했는지 적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1985년 이전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가 위기로 치닫던 1985년 3월, 안드로포프의 뒤를 이어 54살의 나이로 당 서기장이 된 뒤 취임연설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를 강조했고 이듬해 4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어 1989년 10월 제한주권론을 담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공식 폐기했고 1990년 2월 대통령제를 도입해 소련의 초대이자 마지막 대통령이 됐다.
고르바초프가 초대 소련 대통령이 된 해인 1990년, 6월 12일은 사실상 러시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천명한 날이다. 러시아연방 인민대표대회 총회가 '러시아연방 국가주권 선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6월12일이 러시아로서는 일종의 독립기념일인 셈인데, 러시아는 이 날을 '러시아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모스콥스키 콤소몰례츠(이하 MK)지 지난 11일자 인터넷판이 러시아의 날 25주년을 맞아 "당시 총회에서 주권선언문을 채택하지 않았으면 소련이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란 의견도 있다. 정말 그럴까?"란 화두를 내세워 선언문 채택의 주역들에게 당시 상황을 물었다.
바부린 총재는 소련의 개혁정책이 안드로포프에게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상기한 뒤 "그렇게 해서 3명은 (개혁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작이 너무 늦었고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어, 스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돌아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감스럽게도 고르바초프는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고 우리 역시 모두 실패했다"고 했다.
좀 더 들어보자. "러시아는 소련을 구성했던 15개 공화국 중에서 당시 5번째로 주권선언을 채택했다. 러시아에 앞서 발트 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과 아제르바이잔이 주권선언을 채택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당시에는 소련에서 탈퇴할 생각은 없었다.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는 1993년 리투아니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내게 당시 주권선언을 채택했던 것은 단지 소련내에서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소련은 이들 국가에 자유를 주지 않았다. 이후 러시아가 독자적으로 이 자유를 쟁취하면서 소련을 구성했던 나머지 국가들이 우리의 선례를 따랐다."
역시 당시 러시아연방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러시아 초대 국가두마(하원) 의장과 안보위원회 서기 등을 지냈던 이반 리프킨은 MK에 "역사는 가정법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 리스크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실상 만장일치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선언문 중 5항은 별도로 투표에 부쳤다. 5항은 러시아연방 헌법이 소련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으로, 나를 포함해 많은 대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반수를 넘지못했다." 소련 해체에 기름을 부은 5항도 당시 채택됐다는 얘기다. 결국 리프킨은 소련에서 탈퇴할 생각까지는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회고는 이어진다. "당시 대표 대회는 하루 기한으로 열린 것이었지만 한 달 내내 지속됐다.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보리스 옐친은 아예 공산당 탈당까지 선언했다. 우리 모두가 (분당과 탈당에 대해서는) 생각들이 달랐지만 주권선언에 대해서는 한마음이었다."
리프킨은 이어 "개혁의 속도를 놓고 또 논쟁이 붙었다. 대의원 대부분은 고르바초프가 이미 너무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반면 옐친은 급진적이면서도 맹렬하게 개혁을 구현하려했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러시아연방이 주권을 가진 좀 더 독립적인 국가가 된다면 옐친이 실권을 잡고 신속하게 긍정적인 개혁을 이뤄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당시만해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옐친 역시 급부상했다고 한다. "대의원 대회 이전 옐친을 러시아 연방 최고간부회 의장으로 뽑아야한다는 의견을 가진 대의원은 5분의 1에 불과했지만 그가 주권선언문을 채택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인기가 치솟아 의장으로 당선됐다. 그만큼 주권선언문을 채택해야한다는 분위기가 성숙돼 있었던 셈이다."(리프킨)
다시 1990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했을까? 의견은 갈린다.
리프킨은 "마찬가지로 찬성 투표했을 것이다. 나는 당시 국민의 정서를 대변했다. 고르바초프까지도 '만일 우리가 개혁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국민들 스스로 모든 일을 했을거다'고 말한 바 있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의 정치와 경제가 많은 부분에서 러시아는 물론 (소련을 구성했던) 일련의 다른 공화국 국민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훨씬 더 파괴적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라고 했다.
보수 강경 공산주의자인 바부린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1990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겪었던 쓰디쓴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 주권선언문을 날조한 주역 두 명을 떨쳐냈을 것이다. 바로 고르바초프와 옐친이다. 한 명은 (소련)권좌에서 몰아내야 했고 다른 한 명은 (러시아)권좌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만일 미래를 볼 수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것이며 소련의 붕괴도 허용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주권선언문에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내용을 포함시켰다. 이들 두 명의 지도자는 서로 싸우는 통에 선언문을 왜곡시켰다." 러시아 헌법을 소련 헌법보다 우위에 둔 주권선언문 5항까지 채택된 데 대한 통탄인 셈이다.
다행히 당시 주권선언문 8항은 러시아 연방 영토의 변화는 국민투표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도록 규정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러시아 연방은 21개 공화국과 49개 주(州), 6개 변경주(州), 11개 자치주·구, 수도인 모스크바와 특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총 89개의 연방 행정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올해 '러시아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0일 하나의 러시아 국가 기록이 세워졌다고 한다. 모스크바 시내 '포클론나야 고라'(경배의 언덕)에 길이 40m, 무게 120kg, 그리고 면적이 2천100㎡에 달하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러시아 국기가 펼쳐진 것이다. 우주 상공에 떠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도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기를 지탱하기 위해 러시아 비상대책부 요원 300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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