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권 자금, 고도성장 마중물…'과거사 청산' 한계
![]() |
△ 1965년 6월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거행된 한일협정 조인식. 이 조인식에서 양국 외상은 한일기본조약 등 29건의 관계문서에 서명했다. |
<한일수교 50년> ②'미완의 한일협정'…빛과 그림자
14년간 마라톤 협상…식민지배서 정상관계로 '리셋'
청구권 자금, 고도성장 마중물…'과거사 청산' 한계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 한일은 1965년 6월22일 한일협정 체결로 국교정상화를 이뤘다.
일제 35년간의 식민지배를 딛고 한일관계를 정상적 외교관계로 '리셋'하는 역사적 출발이었다.
그러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질곡이 깊었던 만큼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한 한일간의 샅바싸움도 길고 치열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청구권 자금을 종자돈으로 삼아 대한민국은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비약적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협정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 또한 없지 않았다.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 지도자의 역사인식, 일본군 위안부 문제, 조선인 강제징용 등의 문제가 '진행형 갈등'으로 한일관계를 심각하게 저해하고 있다.
한일협정에서 이 같은 과거사 문제를 명확하고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해 갈등의 씨앗이 됐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한일 협정이 '미완의 협정'이라는 비판적 지적이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은 현 시점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식민지배 죄의식 없던 日…14년간의 외교전
"이제 양국은 구원(舊怨)을 잊고 화해하자" vs. "양국 간에 화해할 그 무엇이 있느냐?"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20일 한일간 국교정상화를 위한 첫 예비회담에서 한국 측 양유찬 주미대사와 일본 측 지바 교체 수석대사가 주고받은 말이다.
1965년 협상이 최종 타결되기까지 한일 양국간 '마라톤 외교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평범해 보일 수 있는 대화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한일 양국의 인식 차를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 장면이다.
식민지배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일본 측의 이 같은 태도로 협상은 곳곳에서 난관이 조성됐고 때로는 위기에 봉착했다.
1953년 10월 3차 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인 구보다 간이치로의 망언을 빼놓을 수 없다.
연합국과 일본 간의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1.9.8 체결) 체결 전의 한국의 독립은 무효며,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민에게 유익한 것도 있다는 취지의 망언을 한 것이다.
그는 "만약 일본이 당시 한국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 또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됐을 것이다. 일본의 점령보다 훨씬 비참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이 때문에 회담은 중단돼 4년간이나 표류했다.
한일 양국은 한일 기본관계, 청구권 문제, 이른바 '이승만 라인'(1952년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독도를 포함하는 평화선)과 이를 매개로 한 어업 수역 문제 등 협정 주요 내용에서도 첨예하게 맞서면서 협상은 가다서기를 반복했다.
1960년 4·19 혁명에 따른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뒤이은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 등장, 1961년 5·16 군사정변 등 우리 내부의 정치적 격변도 협상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
협상이 속도를 내지 못하자 5 ·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12일 미국 방문길에 도쿄에 들러 이케다 총리와 회담을 하고 조속한 시일 내 현안을 해결해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그럼에도,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이번에는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나섰다.
그는 1962년 10월20일, 한 달 뒤인 11월12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담판을 벌여 청구권 자금과 관련해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1억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합의,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
이것이 그 유명환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두 사람 간의 합의는 양국 정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달러(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달러 이상)로 조정됐다.
냉전체제에서 공산주의에 맞서 한일을 묶어두려던 미국의 중재 노력도 협상 개시에서부터 난관 돌파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게 작용했다.
14년간의 기나긴 협상은 1965년 6월22일 한일이 총 5개의 조약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을 비롯해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그것이다.
◇고도성장 밑거름…日식민지배 책임 명시못해
청구권 협정으로 들여온 자금은 대한민국의 근대화에 큰 밑거름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지만,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던 상황이었다.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 건설과 경부고속도로 및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 등 국가 기간산업과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요긴하게 쓰였다.
이는 곧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는데 결정적 마중물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965년 30억달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마지막 해인 1979년에는 640억달러로 크게 늘었다.
수출총액은 1965년 1억7천508만달러에서 1979년 150억555만달러로, 1인당 국민소득은 1965년 105달러에서 1979년 1천693달러로 비약적 증가세를 보였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와 개인 청구권 문제가 철저히 마무리되지 못해 '미완의 협정'이라는 지적과 함께 현재까지 한일 간 갈등의 씨앗이 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우선 일본의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어디에도 적시되지 않았다.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기본조약 2조은 한일간의 대표적 '동상이몽'이다.
한국은 강압·불법에 의한 일제의 조약이 체결 당시부터 불법·무효라고 해석하는 반면, 일본은 체결 당시에는 합법이었으나 국교정상화 시점부터 '이미 무효'라고 해석했다.
일본 측 주장은 35년간의 식민지배도 합법적 조약에 따라 이뤄졌다는 의미다.
청구권 자금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는 청구권 협정 2조를 둘러싸고도 한일 간에는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가 이 조항으로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이다.
반면, 우리 정부는 개인청구권은 여전히 살아있다고 맞서 한일 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가장 첨예한 대립전선이 되고 있다.
청구권 자금의 성격도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라는 표현 대신, 민사 채권채무 성격의 '재산 및 청구권'과 '경제협력'이라는 표현으로 포장됐다.
이 역시 식민지배를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저의가 녹아들어 간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한일 협정은 체결 과정 당시부터 '굴욕외교'라는 거센 비판이 일었고, 결국 1964년 이른바 6·3 사태로 전면화됐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협정 체결 다음날인 1965년 6월23일 특별담화를 통해 "어제의 원수라 해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다면 일본 사람과도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민복리를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면서 고뇌의 결단이었음을 강조했다.
당시 한일협정 체결에 실무자로서 참여했던 오재희 전 주일대사는 "일본이 완강히 거부했고,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조약에 명시하려 했다면 도저히 협상이 성립되지 않았다"면서 "과거 식민지 조약이 무효임을 일본으로 하여금 인정시키는 게 어려운 줄 알면서도 우리가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라면서 당시 현실적 한계를 토로했다.
[저작권자ⓒ 부자동네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