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북한 상공서 추락, 죽을 뻔하다 살아난 행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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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공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출신부대 방문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류일형 특파원 = 6.25 한국전쟁 64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해 6월 24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전 참전용사와 미망인들이 '남아공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부대 방문여행' 출발에 앞서 프리토리아 스와트코프 공군기지 공군박물관(SAAF)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뒷 줄 가운데 모자를 쓴 사람과 그 오른쪽에 선 사람이 마이크 물러 장군 부부다. 2014.6.25 photo@yna.co.kr (끝) |
<6·25 65주년> 남아공 전 공군총장 "친구들 희생 헛되지 않아"
소위 때 참전 "한국 발전한 모습 거의 믿을 수 없어"
"당시 북한 상공서 추락, 죽을 뻔하다 살아난 행운아"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류일형 특파원 = "1951년 10월 3일 나는 북한 상공에서 추락, 거의 죽을 뻔하다 살아난 행운아다."
마이크 물러(85) 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공군참모총장은 21살의 젊은 나이에 공군 파일럿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적진에 추락, 구출되기까지의 '4시간 5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훤출한 키에 인자한 인상의 물러 장군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내 인생에 몇 차례 행운이 있었지만 최대이자 최후의 '드라마'는 한국전 참전 중이던 전투기 무스탕 310에서 일어났다"고 회상했다.
전쟁 당시 적진 깊숙이 침투, 철도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은 'C' 비행편대의 편대장이었던 물러 소위는 이틀 전 K-16(성남)에서 새로운 전진기지 K-46(원주)으로 이동한 뒤 3번째 공격임무에 나섰다.
"이륙 후 한 시간 정도 목표를 향해 비행하던 중 조종석 위로 지나가는 구름 연기에 뒤이어 '꽝'하는 굉음을 들었다"고 아찔한 상황을 돌아봤다.
당시 그는 전투기가 적의 공격에 명중됐는지, 무스탕의 취약점인 글리콜 냉각시스템에서 폭발이 있었던 것인지 확실히 몰랐다. 문제는 엔진 온도가 상승하고 있어 더 이상 비행기 안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구조작전이 시작될 수 있도록 동료 조종사에게 편대장을 넘겨주고 탈출을 시도했다.
조종석 덮개(캐노피)를 열었을 때 연기가 안으로 몰려 들어와 전투기가 불에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마음에 캐노피를 열고 신속히 탈출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오른쪽 발이 조종석에 끼여 빠지지 않았다.
몇 차례 필사적인 발차기 끝에 겨우 몸은 빠져나왔지만 이미 전투기 수평꼬리날개가 달아나고 없었다.
낙하산에 몸을 맡겨 높은 산등성이 근처 나무에 착륙했으나 낙하산이 나무를 덮는 바람에 적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낙하산을 걷어 나무 속으로 집어넣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추락한 파일럿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의 위치를 아군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신호용 거울을 꺼내 동료 파일럿이 하늘에서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신호를 보냈다."
그는 더 나은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던 중 정지작업을 해놓은 것처럼 잡목들이 깨끗하게 정리된 한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료가 자신을 발견하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적들에게 노출되기도 쉬운데다 근처에서 자동소총 소리가 들려 자신을 찾아 느리고 낮게 날고 있는 동료의 안전이 걱정됐다.
그는 산 아래 공터로 이동하기로 하고 골짜기를 미끄러져 내려오다 38구경 권총을 잃어버렸지만 찾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산기슭 작은 바위 뒤에 도달해 다시 신호용 거울을 이용해 위치를 알렸다.
한국에서의 구조작전은 환상적이었다.
가능한 한 추락한 조종사가 구조될 때까지 공중전은 사실상 정지됐다.
비록 내가 적진 깊숙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구출하러 온다는 믿음이 조종사들에게는 커다란 사기 진작이 되었고 지도상 2시간 정도면 구조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러나 2시간이 되고 3시간, 4시간이 될 때까지 구조 헬기는 오지 않았고 탈출루트를 찾기 위해 애타게 지도를 보고 있는 젊은 파일럿은 의기소침해져 갔다.
"마지막으로 편대장이 내 위로 낮게 날다가 급상승하면서 꼬리 날개를 좌우로 흔들었을 때는 정말로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고 물러 장군은 당시 심경을 밝혔다.
보통 상황에서라면 '힘내라' '안녕'이라는 뜻이지만 추락한 조종사에게 보내는 신호는 "더 이상의 헬리콥터가 없다. 스스로 해결하라"는 뜻으로 마지막으로 탈출할 방향을 가르쳐주는 것이었기 때문.
그러나 여기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절망에 빠져 지도를 막 치우려는 순간 계곡을 따라 나를 향해 올라오는 시코르스키 S-51 헬기의 환영하는 우렁찬 소리를 들었다."
4시간 5분 만에야 구조된 것이 남쪽에서 보내진 첫 번 째 헬리콥터가 위험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황해도 신계 인근에서 격추당했고 그 호위 항공기 중의 한 대도 격추당했기 때문임을 나중에 알게 됐다.
"수염을 기른 헬기 승무원이 나에게 로프를 내려주었을 때의 그 멋진 광경과 그가 나를 헬기 안으로 끌어당길 때의 안도감을 잊을 수가 없다. 조종사는 돌아보면서 나에게 미소를 지었고 이륙할 때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물러 장군은 "우리가 북한 동해안 흥남부두 밖에 정박해 있는 미군 군스톤 홀 LSD 5 배로 오는 도중 4대의 전투기가 우리를 에스코트하는 것을 볼 때의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며 새삼 감격해 했다.
남아공 공군참모총장과 칠레 대사를 역임한 물러 장군은 "내가 공헌한 바는 많지 않지만 한국이 자유를 회복하는데 기여했다는 것에 크게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국전 이후 2005년과 2008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한 물러 장군은 "처음 본 한국은 매우 미개한 나라로 안타깝게 여겼는데 다시 방문했을 때 엄청나게 발전한 것을 보고 거의 믿을 수 없었다. 친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남아공은 한국전에 연인원 800여 명의 공군 전투비행대대와 34명의 육군 병력을 파병했으며 34명의 조종사 등 모두 36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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