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5주년> 마거릿 트루먼 회고록에 담긴 한국전 초기
트루먼에게 6·25는 전후 질서에 대한 첫 정면 도전
(워싱턴=연합뉴스) 김세진 특파원 = 65주년을 맞은 6·25 전쟁은 한국인에게 시산혈해의 참상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전쟁은 한국인을 돕고 자유세계를 지키고자 결연히 뛰어든 미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렵사리 수립된 세계 질서에 처음 정면으로 도전한 사례였다.
6·25 전쟁이 시작되고부터 약 2년의 기간에 미국 대통령으로 일했던 해리 트루먼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점은 그의 외동딸 마거릿 트루먼 대니얼이 쓴 회고록 '해리 트루먼'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트루먼에게 6·25 전쟁은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 = 회고록을 보면 트루먼 당시 대통령은 북한의 전면 남침 소식을 듣자마자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라는 두 축으로 구성된 2차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가 자칫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6·25 전쟁)는 지난 5년간 논의해 온 집단안보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대목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그(트루먼)가 (워싱턴D.C.에) 착륙하기 거의 2시간 전인 (6월 25일) 오후 6시(한국시간 26일 오전 7시)까지 아버지는 북한의 '정당한 이유 없는 공격 행동'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찬성 9, 반대 0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채택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유엔의 권위가 시험대에 섰음을 의미했다. 북한이 만약 남한 점령에 성공한다면 유엔은 전 세계의 면전에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토에 가입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국가로서의 (미국이 보일) 신뢰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나토 회원국에서는 적지 않은 수의 정치인들이 우리가 과연 러시아와 만약의 사태가 생겼을 때 자신들의 편을 들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의 저항 의지, 그리고 자유세계에 대한 공산주의의 공세에 대응할 준비가 돼 있다는 '트루먼 독트린'의 진정성이 시험받고 있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이 6·25 전쟁을 단순히 한반도나 동아시아에 국한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냉전 구도를 뒤흔들 수 있는 사안으로 접근했다는 해석도 이 책에 담겼다.
회고록을 보면 트루먼 전 대통령은 대책회의 도중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지금 충분히 강하게 한다면, 3년 전 우리가 그리스에 했던 것처럼 일어선다면 그들(공산주의자)은 어떤 다음 움직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저 기다린다면 그들은 이란으로 들어가고 중동 전체를 장악할 거다. 우리가 지금 나서서 싸우지 않을 때 그들이 뭘 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또 당시 발표한 대국민 성명에서 '이 공세는 분명히 소련의 조장을 받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한국의 붕괴를 용인한다면 소련은 아시아를 조금씩 삼켜갈 것이다. 만약 아시아가 넘어가면 근동(유럽과 중동의 중간 지역)이 무너지고 유럽이 불가피하게 그 뒤를 따를 것이다'라고도 밝혔다.
그는 '이 일(6·25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될 가능성'을 크게 두려워했다.
이런 기본 시각을 고려하면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미국이 유엔을 통해 한국에 개입하기 위해 매우 신속하게 움직인 배경도 이해할 수 있다.
회고록에 따르면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1950년 6월 25일 오후(한국시간 6월 26일 새벽)에 '유엔 전 회원국이 '최후의 수단' 조항에 따라 행동하도록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 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이에 '아버지(트루먼 전 대통령)는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에게 즉시 전화를 걸도록' 승인했다.
'이런 신속한 움직임이 소련인들의 발을 묶었다. 그들은 유엔 안보리에서 대만 대신 중국을 회원국으로 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안보리 회의 참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밤(한국시간 28일 아침)에는 유엔 안보리에서 '여전히 러시아가 불참한 가운데, 회원국이 '한국에서 무력에 의한 공격을 격퇴하고 세계 평화와 지역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한다'는 내용의 또 다른 결의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구역 밖에 있다고 연설했던' 인물이지만, 막상 6·25 전쟁이 발생하자 유엔이라는 형식을 갖춰서였기는 하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에 참전하기 위한 바탕을 마련했음이 회고록에 기술돼 있는 점은 이채롭다.
◇개전 초기에는 미군 역시 제대로 못 싸웠다 = 6·25 전쟁이 터진 직후 한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많은 역사가는 미국 역시 북한군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지적해 왔으며, 이 회고록에도 그런 내용이 반영돼 있다.
1950년 6월 25일 밤(한국시간 26일 오전)에 수신된 존 무초 당시 주한 미국대사의 전문을 통해 수신된 보고서 내용에 대해 회고록에는 '완전한 혼돈 상태였다'고 기술돼 있다.
개전 초기 트루먼 행정부 내에서는 공군과 해군력만으로도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러면서 미국에서는 '한국군이 빠르게 약화되는 것으로 보였고, 그들의 지도력은 무기력하고 결단력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단호한 태도는 필수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있었다.
회고록은 1950년 6월 28일 오전 10시(한국시간 28일 오후 11시)에 서울에서 무초 대사가 보낸 전문 내용 중에 '상황이 너무 빠르게 악화돼서 대통령의 결정과 처치 장군 일행의 도착이 알려지지 않았다면 전날 밤까지 이어진 한국인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가능했을지 의심스럽습니다'라는 대목을 전했다.
이 시점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아마도 한강 남쪽에서 한국군의 재조직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는 무초 당시 대사의 의견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회고록 표현에 따르면 '북한이라는 도적의 습격을 재빨리 격퇴할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1950년 6월 29일 오전 7시(한국시간 29일 오후 8시)에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이끄는 지휘부와 미국 국방부 사이에서 원격회의'가 있었고, 이 회의에서는 '한국군에 50% 정도의 인명 손실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서 전선을 다시 구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는 보고가 전달됐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투입된 미군 병력 역시 한국군에 비해 장비가 그다지 잘 갖춰지지 않았다.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결국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잔인하게 찢겨버렸다'고 회고록은 묘사했다.
'미국인들은 전선으로부터 북한 장비의 우수성과 얼마나 북한군의 전투 준비가 잘 됐는지를 주장하는 보고가 계속 쏟아져 들어오는데 대해 매우 놀랐다'는 회고록 내용 역시 개전 초기의 혼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1950년 9월에 실시된 인천상륙작전은 회고록에서 '일종의 도박'으로 간주됐다.
1950년 6월 26일 오후(한국시간 27일 새벽)에 당시 주미한국대사였던 장면이 백악관을 찾았을 때의 모습도 회고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애치슨의 인도를 받아' 트루먼 전 대통령을 만난 장 대사는 '매우 침울해 있었다'고 묘사돼 있다.
장 대사가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이승만 대통령이 전화를 해서 한국군에 야포도 전차도 전투기도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고, '아버지(트루먼 전 대통령)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설명도 회고록에 수록됐다.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유엔군 사령관과 트루먼 전 대통령과의 악연 = 회고록 중 6·25 전쟁에 대해 기술한 부분 중 상당량은 트루먼 전 대통령과 전쟁 직후 유엔군 사령관이 된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악연과 그로 인한 갈등이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맥아더 사령관에 대한 평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 격퇴의 발판을 마련한 영웅'이라는 칭찬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을 무시하고 만주를 공격하려 했고 심지어 만주에 핵무기를 쓰려 했다'는 비난이 대립하고 있다.
이 회고록이 맥아더 사령관과 갈등 관계였던 트루먼 전 대통령의 시각에서 쓰였음을 감안하더라도, 맥아더 사령관이 전장보다 미국 내 정치를 더 신경을 썼고 수시로 '군 최고 통수권자'의 명령을 무시했음을 회고록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회고록에 수록된 맥아더 사령관과 관련된 대목을 볼 때 가장 아쉬웠던 점은 아마도 맥아더 사령관의 상황 판단 능력이었을 것이다.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밀리기를 거듭했던 1950년 7월 31일에 맥아더 사령관은 '승인 없이 대만의 (지원) 수요를 자체 판단하고 왜 우리가 한국에서 대만 병력이 필요하지 않은지 설명하기 위해 대만으로 여행했다'고 회고록은 적었다.
게다가 '맥아더가 가는 곳마다 대중의 눈길을 끌면서 마치 우리가 대만과 상호방위조약이라도 맺는 듯한 인상을 줬다'고도 기록했다.
북한군이 남한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던 시점인 1950년 8월 26일 맥아더 사령관이 '미국 해외참전용사회에 보낸 성명에서 미국 정부가 대만을 포기하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며 비난했다'는 대목도 회고록에 있다.
이때부터 트루먼 전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의 갈등은 시작됐고, 이에 대해 회고록은 '아버지는 대만 문제 때문에 맥아더 장군을 즉각 해임하려 했지만, 이미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승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생각을 바꿨다'고 적고 있다.
회고록 내용만을 보면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맥아더 사령관의 판단은 말 그대로 '오락가락'이었다.
1950년 10월 초에 '중국과 가까운 나라들로부터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이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겠다는 경고가 있었다는 소식이 계속 들어왔다. 며칠 뒤부터는 중국은 관영 라디오방송으로 이런 경고 내용을 계속 내보내기 시작했다. 맥아더와 그의 정보참모 찰스 윌러비는 이런 경고를 유엔 결의안을 막기 위한 정치적 협박이라고 무시했다'는 설명이 있다.
같은 달 15일 트루먼 전 대통령은 괌 동쪽 서태평양에 있는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 사령관을 만났고, 이때 맥아더 사령관은 트루먼 전 대통령에게 '해외참전용사회 성명 건에 대해 당황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며 '중국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말했고 1951년 1월이면 1개 사단 병력을 유럽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만주에 약 30만 명의 중국군 병력이 있고 그중 5만에서 6만 정도만 압록강을 건널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고록을 보면 1950년 10월 30일에 '함흥 근처에서 잡힌 중국 포로 16명은 같은 달 16일 - 맥아더 장군과 아버지(트루먼)가 웨이크 섬에서 회담한 바로 다음날 -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고 실토했다.
1950년 11월 초에는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장군이 (유엔군 지휘부가 있는)도쿄에 '잘 조직된 신규 병력, 일부는 중국군으로 구성되는 병력에 의해 매복과 기습공격을 받고 있다'고 전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진격을 계속하라는 말 뿐이었다'고 하소연한 내용도 있다.
중국군의 대공세에 밀렸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1951년 3월 맥아더 사령관은 '정부 정책에 대해 승인을 받고 언론 인터뷰에 응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정면으로 어겼다. 그는 유나이티드 프레스의 휴 베일리 사장과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는 8군이 38선에서 멈추도록 한 데 대해 최대한의 경멸을 표했다'고 회고록은 기술했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이 '국무부에 주의 깊게 구성된 (휴전) 제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고, '(1951년) 3월 20일에는 맥아더 장군에게도 이 계획이 알려졌다'고 회고록은 설명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관은 같은 해 3월 24일 '휴전이 가능하다는 성명'을 내면서, 회고록 표현에 의하면 '아버지(트루먼)의 평화 협상이 시작도 하기 전에 망가지도록 한 구절'을 담았다.
회고록은 '장군의 공허한 수사는 중국 측으로 하여금 우리가 협상에 진지하지 않다는 인식을 줬고, 그들은 맥아더의 최후통첩을 비아냥거리면서 거부했다'고 표현했다.
결국 '아버지(트루먼) 자신에게 이미 맥아더는 해고 상태였다. 다만, 시점이 문제였다'는 회고록 내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점부터 맥아더 사령관과 트루먼 전 대통령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게 돼 버렸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1951년 4월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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