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만 보이는 독일 정치, '초라한' 사민당 어디에 있나
슈마허, 브란트, 슈미트 이을 큰 지도자 없이 허우적
(베를린=연합뉴스) 고형규 특파원 = 독일의 현 집권 다수당인 기독민주당(CDU)은 '메르켈당'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이 정당의 지지도가 자매정당인 기독사회당(CSU)까지 합쳐 42% 안팎을 유지하는 것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개인 인기에 편승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2005년 총리에 오른 이후 내리 3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고, 오는 2017년 총선 때에도 이변이 없는한 총리후보로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그리고 정당 지지도가 여전하다면 그가 또 한번 총리에 오를 공산이 크다.
성급한 가정이지만, 메르켈이 2017년 총리가 되어 4기 집권을 지속한다면 그를 정치자산으로 발탁한 헬무트 콜 전 총리과 동급의 반열에 오를 전망이다.
독일 통일을 이끈 콜 전 총리는 동독 물리학자 출신의 신진 정치인 메르켈을 통독 초대 내각의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메르켈의 '아우토반 질주'를 도운 후견인이다.
그런 콜 전 총리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집권했으니, 메르켈 총리가 2005년부터 2021년까지 집권한다면 총리 재임 기간이 같아 지기까지 한다.
독일 현대 정치사를 통틀어 최장 집권 햇수의 쌍두마차가 된다는 얘기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옛 서독의 기초를 닦은, 같은 당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의 집권 기간(1949∼63년)마저 능가하는 의미심장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해 CDU와 더불어 독일 정치를 조타하는 사회민주당(SPD)의 현재 모습은 초라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당 전체의 정책 역량이나 CDU를 압도하는 역사적 연륜의 측면보다는 큰 지도자의 부재와 리더십의 약화라는 차원에서 특히 그렇다는 지적이다.
70년 된 전후 정당 CDU에 견주어, 1863년 창당된 19세기 출발 정당이자 1959년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을 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결별 같은 국민정당화 선택 등 굴곡을 겪은 SPD는 증조부 격이다.
그 SPD는 1969∼74년 재임시 동방정책을 앞세워 장기적 통일 기반을 닦은 빌리 브란트 전 총리뿐 아니라 그의 동방정책을 계승하고 오일쇼크 경제위기를 극복하며 독일의 현대적 시스템을 정비한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라는 큰 지도자를 배출했다.
실업병을 앓던 독일에 '하르츠 개혁'이라는 대수술을 가해 독일 재도약의 기반을 다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의 메르켈 총리가 지나고 있는 '번영의 독일'이라는 시대와 '잘 나가는 메르켈'이라는 평가는 슈뢰더 스스로 밝힌 대로 '슈뢰더 덕분'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지나친 말은 아니다.
역으로 슈뢰더 전 총리의 그 '우향우' 개혁으로 말미암아 2005년부터 정권을 이끄는 주도 정당은 SPD에서 CDU로 넘어갔으니 정치의 역설이 따로 없다.
SPD에는 이에 앞서 CDU의 간판이자 전후 독일의 방향을 잡은 콘라트 아데나워의 대항마로서 쿠르트 슈마허라는 걸출한 리더가 있었다.
전후 SPD 재건을 주도하고 독일 현대 사민주의 정치의 근간을 엮은 슈마허는 나치정권과 공산주의에 쌍끌이로 저항하며 리더로 성장하고는 아데나워 집권기 여당의 주요 정책 드라이브에 강력한 브레이크 역할을 자임했다.
1차 세계대전 참전 중 팔을 잃기도 한 슈마허는 총리직에 앉지는 못했지만, 정파를 떠나 국익을 생각한 국민적 정치인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최근 SPD를 향한 대중의 정당 지지도와 리더 선호도는 영원한 맞수인 CDU와 메르켈의 그늘에 가려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SPD는 중도좌파 노선 영향으로 좌파 지지는 좌파당(Die Linke)에 빼앗기고 사민주의적 정책 주도권은 CDU의 '좌향좌' 정치노선 클릭 조정에 오버랩되면서 지지율이 24% 선에 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메르켈 대연정의 부총리이자 SPD 당수로 있는 지그마어 가브리엘을 총리로 지지하겠다는 독일인은 14%(여론조사기관 포르자)에 불과한 수준이다.
70%에 육박하는 이들에게서 총리업무 수행이 만족스럽다는 소리를 듣고 56%는 총리로 지지한다는 평가까지 받는 메르켈과는 대차가 난다.
그러다 보니 가브리엘 부총리는 당내 상당수 세력으로부터도 차기 총리후보로 적합한 인물인지까지 의심받고 있다.
SPD가 대연정의 소수당 파트너로서 CDU와 국정의 동반자이고 그 역시 대연정의 넘버2로 역할하지만, 대연정 내 야당 노릇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은 그에게도, SPD에도 뼈 아픈 대목이다.
가브리엘은 진보언론들이 미국과 독일간 공조에 의한 정보당국의 '도청 스캔들'을 터뜨리며 대연정의 문제점을 거론했을 때에도 CDU와 각을 세우다 말았고, 그리스 위기 대응에선 긴축정책의 폐기에 기우는 듯 하다가 유럽의 원심력을 키운다며 그리스 정부를 비판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이란 핵 협상이 타결되자마자 이란과의 비즈니스를 위해 테헤란으로 날아가는 순발력을 보이면서 경제장관을 겸한 부총리의 사업 마인드를 보여줬지만, 이는 독일과 특수관계인 이스라엘 및 유대계의 반발을 초래하는 등 후폭풍을 일으켰다.
물론 가브리엘 부총리와 SPD가 대연정 참여 소수당으로서 최저임금제 도입 시행 같은 노동 의제를 관철시키는 등 정책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점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일부 전문가들의 관찰은 SPD와 가브리엘에게 딜레마를 안기고 있다.
베를린자유대의 게로 노이게바워 교수는 로이터 통신에 유권자들의 표심은 대연정이라는 자동차의 엔진(SPD)보다는 그 차를 몰고 있는 운전사(메르켈)에게 쏠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가브리엘 부총리에게 조언했다.
허우적거리는 SPD를 향해 독일 보수언론들도 냉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FAZ)은 31일 메르켈 총리의 여비서를 화자로 하는 만평에서 이렇게 풍자했다.
"메르켈 여사님, 가브리엘 선생님께서 전화로 묻네요. 메르켈 여사님께서 SPD 당수직도 넘겨받으실 의향이 있으신지요."
만평은 그러고는 바로 밑에 "오랜 전통을 가진 독일의 노동자정당(SPD)에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라고 적었다.
또한, 대중지 빌트는 휴가를 떠난 메르켈 총리를 대신해 가브리엘 부총리가 각의를 주재한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가브리엘의 '오락가락 정책'을 비판하는 당내 목소리를 소개하며 아예 '가브리엘이 총리가 될 수 있을까?(제목)'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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