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 품은 엄마와 죽음 예감하는 남자…장강명이 말하는 '삶'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서울=연합뉴스) 한혜원 기자 = 남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신을 괴롭히던 같은 반 남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다.
여자는 도박과 외도를 일삼는 아버지에게 매 맞으면서도 집착하는 어머니, 애정이 없는 언니 사이에서 외톨이처럼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운동장 철봉에 앉아 '비 냄새'를 이야기하던 두 사람이 작가와 출판사 편집자로 만난다. 9년형을 살고 나온 남자가 문학상 공모에 낸 작품에 여자와 운동장에서 나눈 말들이 쓰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남자가 새 소설의 배경으로 삼을 마포구 일대를 함께 돌아다니며 옛 설렘과 호기심의 감정을 이어간다.
이런 두 사람의 뒤를 한 아주머니가 집착하듯 따라다닌다. 이 아주머니는 남자가 고등학교 때 죽인 남자의 어머니다.
여론은 아들의 죽음을 일진이 동급생을 괴롭히다 몸을 열네 번이나 찔려 죽은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친구를 괴롭힌 게 아니라며 집요하게 남자 뒤를 밟는다.
남자는 아주머니가 결국 자기를 죽일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고교시절 추억을 공유한 여자와 만남을 감행한다.
"A와 B, 두 가지 노선이 있어. A는 슬프지만 아름답게, 오늘 헤어지는 거야. 나는 이편을 추천해. (중략) B는 내일이나 모레쯤 헤어지는 거야. 대신 아주 비참하게 헤어지게 돼. 못 볼 꼴을 보게 될지도 몰라."(46쪽)
소설가 장강명(40)의 5번째 장편이자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인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하 '그믐')은 작가가 이전까지 보여준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장씨는 '열광금지 에바로드'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에 열광하는 '오타쿠' 이야기를, '표백'에서는 꿈 없이 방황하다 자살을 택하는 신세대의 모습을, 최근작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희망 없는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새 삶을 찾는 젊은이의 현실을 그렸다.
반면 '그믐'에서 작가는 오로지 시간을 한 방향으로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한다.
괴롭힘을 당하다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그 남자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 여자, 그리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 세 인물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작가는 시간과 기억, 속죄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나간다.
소설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죽은 학생이 진짜 일진이었는지 풀어내는 데 관심이 없다. 이제 자기가 죽을 운명임을 우주의 '패턴'으로 받아들인 남자는 담담하게 모두가 행복할 길을 마련해둔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148쪽)
작가는 문학상 수상 후 권희철 문학평론가와 인터뷰에서 "'그믐'은 내가 평소에 쓰려고 했던 종류의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며 "나는 '그믐'의 성취가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188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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