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검찰보고서 "침실에서 목매달아 절명"…학계의 음독자살설은 오류
<광복70년> 순국 110주년 이한응 열사의 마지막 나날
구국외교 순국 1호…일제의 주권침탈 저지 외교전 펼치다 끝내 자결
영국 검찰보고서 "침실에서 목매달아 절명"…학계의 음독자살설은 오류
(런던=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 110년 전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국 주재 외교관으로 일본의 국권 침탈에 자결로 항거한 이한응 열사.
유럽에서 최초의 구국 외교활동을 펼치다 순국한 그의 마지막 나날은 어땠을까? 무엇이 31살의 젊은 외교관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으로 내몰았을까?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이한응은 16살에 관립 영어학교에 입학해 2년간 영어를 배운 뒤 과거에 합격해 한성부 주사를 거쳐 1901년 3등 참서관으로 민영돈 공사와 함께 런던에 외교관으로 부임했다.
고종 황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와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계기로 구미에 외교관을 상주시켜 열강을 상대로 한 외교전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의 조선 주권 침탈이 노골화하면서 이듬해 민영돈 공사가 귀국했고 이한응은 고종의 특명으로 공사대리를 맡아 주영 공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한응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견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대한제국의 장래가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했다. 이에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에는 영국 외무부에 두 차례에 걸쳐 한반도 정세에 대한 장문의 메모를 전달했다. 정세가 급변하더라도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가 침탈되지 않도록 영국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이미 일본 쪽으로 기운 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 외무부의 차관보는 이한응이 제출한 메모 위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며, 그의 정부는 그에게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분명하다"라고 썼다.
이한응의 마지막 생애를 되밟아보는 과정에서 직접적인 사인도 새롭게 밝혀졌다.
그의 죽음은 음독자살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영국 경찰의 검시보고서는 침실문 뒤쪽 벽 고리에 커튼 끈으로 목을 매 숨진 상태로 집사에 발견된 것으로 기록했다.
옛 정부 문서를 뒤져 이런 내용을 찾아낸 주영 한국문화원의 폴 웨이디 대외협력 담당은 "이한응의 자결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용인하는 영일 동맹의 개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한응은 일본이 영일 동맹을 개정해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는 조항을 삭제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런던 외교가에 제기했다.
옛 경찰 조서에 따르면 이한응은 순국 전날 밤인 5월 11일 내용을 알 수 없는 전문을 받고서 크게 좌절했으며 이를 파기한 다음 침실에 들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순국을 앞두고 이한응이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불안감에 시달렸다는 정황도 발견된다.
이한응은 숨지기 수주전 일본 요원으로 보이는 괴한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신고했지만, 경찰은 이런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무시했다.
이한응은 당시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의 일원인 이웃의 권유로 요양차 런던 남부 도킹으로 그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 오기도 했다.
본국과 비밀 교신마저 불가능해 영국 외무부 동아시아 담당관에게 일본의 방해 없이 고종에게 직접 보고를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 사실도 자료로 확인됐다.
순국 후 이한응의 시신은 고종의 특명으로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됐으며 내부협판으로 추서됐다.
이한응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런던 공사관은 같은 해 12월 외부대신 이완용의 명령으로 폐쇄 조치가 이뤄졌고, 공사관의 모든 서류와 가구는 일본공사관으로 인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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