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행 전쟁포로 김명복씨 "고향땅 밟을 날 기다리겠다"

편집부 / 기사승인 : 2015-08-10 17: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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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홈' 조경덕 감독 "76인의 포로 아무도 '광장' 못 찾아"
△ 거제도 찾은 제3국행 전쟁포로 출신 김명복 강희동씨 (서울=연합뉴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제3국행을 택한 전쟁포로 출신 브라질 농부 김명복(왼쪽부터)씨와 강희동 목사가 10일 오전 경남 거제시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서 창살 밖을 내다보고 있다. (조경덕 감독 제공)

제3국행 전쟁포로 김명복씨 "고향땅 밟을 날 기다리겠다"

'리턴홈' 조경덕 감독 "76인의 포로 아무도 '광장' 못 찾아"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끝까지 기다려봐야죠. 내 소원이 그거니까. 불법적으로 할 수는 없으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기다리겠습니다. 돌아갈 때까지."

휴전선 넘어 북쪽에 있는 고향 땅을 밟아보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을 찾은 김명복(79) 씨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는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 체결 후 북한 송환과 남한 체류를 모두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전쟁포로 '76인' 중 한명이다.

김 씨는 조경덕(41) 감독이 촬영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리턴 홈(Return Home)' 촬영 일정의 하나로 한국을 찾았다. 고향인 평안도 용천을 떠난 지는 65년 만의, 한국을 떠난 지는 61년 만의 귀향이다.

김 씨는 새로운 국적을 취득하고 터전으로 삼아온 브라질에서 출발해 60여 년 전 고향을 떠났던 여정을 거꾸로 되짚어가는 긴 여행을 조 감독과 함께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망명을 받아줄 나라를 기다렸던 인도를 거쳐 인천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배를 타고 떠났으나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다는 점만 다르다.

역시 석방된 전쟁포로 중 하나로 브라질을 거쳐 미국에 정착한 강희동(87) 목사가 합류해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경남 거제도와 부산을 다녀왔다.

10일 오후 종로구 자하문로의 한 카페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들은 며칠 뒤에는 김 씨가 한때 도망쳤다가 다시 인민군에게 잡혔던 임진강 강가를 지나 판문점으로 향한다.

김 씨가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열다섯 나이에 인민군에 징집되면서 떠난 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북의 고향 땅이다.

"호랑이도 죽기 전에는 자기 고향을 찾아간다고 그러죠. 나이가 드니 집 생각이 나요. 어머니, 아버지는 나이가 있으니 돌아가셨을 테지만, 누나와 남동생도 있는데 세상을 떠났는지 소식도 몰라요. 내가 자라난 땅이 그립고, 내가 다니던 교회도 가보고 싶고. 아직도 그때 식구들이 '명복아 일어나. 교회 나가자!' 했던 소리가 생각나요."

60년 넘는 브라질 생활로 한국말이 다소 어눌해진 김 씨는 고향 이야기를 하며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고 브라질에 정착해 결혼해 아이를 기르던 시절을 말할 때는 상경한 자식 자랑을 하는 여느 시골의 부모님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브라질에서 공부하다가 집안사람(아내)을 만났는데, '나는 가진 게 없는데' 생각이 들더라고. 우리 집안사람이 대단해요. 아이, 자꾸 자랑해서 미안합니다. 딸 둘, 아들 둘 있어요. 젊었을 때는 한국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도 못했어요. 열심히 일해서 자식 공부시켜야지. 다들 공부를 그렇게 잘했어요. 대학 나와 자기 직업 가지고 잘 삽니다. 손주도 있어요."

이 자리에서는 남도, 북도 아닌 제3국행을 선택했던 당시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대한 답변은 강 목사가 했다.

"협정이 맺어질 때 우리 민족에게는 단지 두 가지 선택만 있었어요. 북한을 지지하느냐, 남한 정권을 지지하느냐. 20세도 되지 않은, 직업도 없는 이 청년들로서는 조국 땅에서 살아가기 어렵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어요. 분쟁 많은 이 땅을 떠나 평안하고 자유로운 땅에 가보고 싶었던 거죠. 공산 정권이고 민주 정권이고 결함이 많다고, 두 가지 선택을 초월해서 이상적인 땅에 살고 싶다는 게 근본적인 이유였을 겁니다."

조 감독은 제3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과거 상황, 그리고 끝나지 않은 이념논쟁 속에 놓인 현재의 현실을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빗대어 설명했다. '광장'의 주인공은 이념의 덫에서 고뇌하다가 제3국행을 택하나 바다에서 사라진다.

"저 역시 '이들이 왜 제3국을 선택했을까'가 작업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들은 왜 지구 정반대편에서 60년간 생활하고도 사상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안타까움이 생겼죠. 소설 '광장'은 중립국으로 떠나면서 자살을 택하는 듯한 열린 결말로 그려집니다. 저는 (전쟁포로) 생존자들을 찾아보면서 '이분들 중 한 명도 광장을 찾지 못했구나' 느낌을 받았어요."

가능성 희박한 고향 방문을 실행에 옮겨 시도하고 있는 이도 유일하게 김 씨뿐이다.

이날 조 감독이 공개한 영상에서 김 씨와 같은 전쟁포로 출신 노인들은 "북한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표시하며 강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강 목사 역시 방북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자신은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을 찾았을 때 강 목사와 함께 배식 당시를 재현한 장면을 보던 김 씨는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해맑게 웃었다고 한다. 김 씨는 이번 여정의 목적 중의 하나가 "더 이상 전쟁 없는 세상을 이뤄 평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전쟁 때문에 나도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났고 얼마나 많은 불행이 일어났습니까. 전쟁 없이 화해해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009년 11월 제34회 상파울루영화제에서 영화 '섹스볼란티어'로 대상을 받은 조 감독은 영화제 참석을 위해 브라질을 찾았다가 전쟁포로 출신 5명을 만나면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미국, 인도에 살고 있는 이들의 육성을 담고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으면서 작업을 계속한 지 6년이다. 그 사이 인터뷰한 몇몇은 세상을 떠났다.

조 감독은 이념과 사상을 떠나 우리 사회가 겪은 역사의 한 부분이자,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분단의 아픔을 생각하자는 뜻으로 이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소개했다.

"어느 쪽에서는 '빨갱이 영화를 하냐'고 하고 어느 쪽에서는 '극우 영화'라고 합니다. 이념적인 색깔로 보기 때문이죠. 60년 전 우리 사회가 겪었던 게 끝나지 않고 이대로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갈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가 광복 70년, 분단 70년 되는 해잖아요. 이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조 감독은 애초에는 서너 개월 작업해 이들의 목소리 정도만 담을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한 많은 삶과 고향을 가고자 하는 진심을 접하면서 마음을 바꿨고 프로젝트는 6년간 계속되고 있다.

작업을 언제 마무리해 개봉을 준비할 것인지 질문에 조 감독은 기약이 없다고 했다.

"고향 방문이 좌절되면 저도 영화가 빨리 마무리되고 좋겠죠. 하지만 제가 한 약속이 있기 때문에 최대한 노력할 거고 (개봉이) 언제가 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김 할아버지 가족들은 방북을 반대합니다. 그분들께 할아버지를 댁까지 다시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것까지가 제게 남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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