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 끈질긴 풀뿌리 저항, 정치적 구심점 확보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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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학연구회 관계자 등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왜곡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하단에 보이는 문서는 성명서. |
<전후70년 일본> 바꾸려는 아베· 지키려는 시민사회
아베 정권, 안보법제 개편하며 보통국가 향해 질주…역사 뒤집기 시도
시민사회 끈질긴 풀뿌리 저항, 정치적 구심점 확보가 과제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헌법이 생긴 지 세월이 오래돼 시대에 맞지 않게 된 조문도 있을 것이다."(아베 신조 총리, 2015년 3월 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총리 정치 구상이 향하는 종착역이 엿보이는 발언이다.
종전 70년을 맞은 일본은 아베 총리가 패전국의 멍에를 벗고 보통 국가를 만들고자 내세운 일련의 구상에 따라 크게 요동치고 있다.
대대적인 안보 체제 개편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 이면에서는 가해의 역사를 미화하는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일본 시민사회는 일본이 평화 국가의 길을 버리고 전쟁하는 국가가 될 것이라며 이에 맞서고 있다. 역사를 직시하라는 외침도 내고 있다.
◇ 아베, 보통국가 향해 질주…역사 인식은 퇴행
2012년 12월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아베 총리는 선거를 거듭하며 전후 체제(패전 이후 연합국 점령기에 형성된 평화헌법 체제) 탈피에 필요한 힘을 비축했다.
아베 총리가 재집권한 당시 집권 자민당은 연립 여당 공명당과 중의원의 3분의 2를 장악했으나 참의원에서는 과반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베 정권은 다음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둬 입법권을 장악했다.
여당은 2013년 12월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부가 멋대로 비밀을 지정해 불리한 정보를 감출 수 있다는 지적을 받은 특정비밀보호법을 제정했다. '밀어붙이기' 정치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아베 정권은 2014년부터는 안보 관련 법과 제도 변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2014년 4월에는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무기수출 3원칙'을 '방위장비 이전 3원칙'으로 대체해 방위 산업의 조직적 육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같은 해 7월에는 헌법 해석 변경이라는 초유의 조치로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정부 견해를 마련했다.
약 1년 후인 지난달 16일 아베 정권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집단자위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법률 등 일본의 안보 체계를 크게 바꾸는 11개 법률 제·개정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현재 이들 법안은 참의원에서 심사 중이며 올해 정기 국회 회기가 끝나는 9월 27일 전에 참의원 본회의를 통과해 성립할 예정이다.
이들 입법이 완료하면 일본은 지구촌 곳곳에 자위대를 파견해 미군의 작전을 후방지원 할 수 있고 자국이 공격받지 않더라도 집단자위권을 행사해 다른 나라를 상대로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안보 법제 개편이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면서 일본은 전쟁할 수 있는 국가, 보통국가의 대열에 한 걸음 다가섰다.
아베 총리는 내년 참의원 선거를 전후로 단계적 개헌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런 시나리오대로라면 일본은 전쟁과 무력행사 등을 금지한 헌법 9조를 수정하고 자위대 대신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아베 정권은 군국주의나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사죄해 온 역대 정권의 노력을 퇴색시키는 움직임을 병행했다.
우선 아베 총리 본인과 일부 각료가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참배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아베 정권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河野)담화를 검증해 흠집냈고 일본군 위안부 강제 연행을 보여주는 문서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정부 견해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또 근현대사 교과서에 정부의 통일된 견해를 기술하도록 검정 기준을 변경한 결과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살해된 조선인 피해자가 수천 명이라는 내용에는 '자경단에 살해된 사람은 230여 명'이라는 과거 일본 사법성 통계가 추가됐다.
일본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도덕 교육은 정식 교과목으로 승격될 예정이며 이에 따라 애국심 교육도 강조된다.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거나 축소하고 자랑스러운 일본을 강조하는 것은 '강한 일본',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를 만드는 작업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 시민사회 들풀처럼 아베에 맞서…정치세력화 못해 한계
그러나 아베식 정치는 예상을 넘은 반발에 직면하고 있다.
원전 재가동 정책,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등 밀어붙이기에 대한 저항은 전부터 있었지만, 안보법안 추진과정에서는 터져 나오는 반발의 양상은 사뭇 달랐다.
작년에 안보법안의 토대가 되는 헌법 해석 변경이 이뤄질 때는 그리 큰 저항이 없는 듯했으나 최근 국회 심의에서 위헌 논란이 커지면서 반대 여론에 불을 붙였다.
국회를 에워싸고 열린 시위에는 각계각층이 참가했고 주최 측 추산으로 많게는 6만 명이 집결하기도 했다.
집단 자위권 법안에 반대하는 대학생 중심의 청년 단체인 실즈(SEALDs)가 시위 현장에서 주목받았고 고교생이나 유모차를 끄는 주부까지 안보법안 반대 시위에 가세했다.
정치평론가 모리타 미노루(森田實) 씨는 최근 일본 시민이 보여준 저항을 1960년 미·일 안보조약 개정에 맞서 이뤄진 대표적인 반체제 운동인 이른바 '안보 투쟁'과 비교해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당시 운동은 노동조합, 학생 운동조직 등 이른바 '프로(프로페셔널, 전문가)들의 운동이었고 지금은 일반인, 아이가 있는 주부, 여성의 운동"이라며 "'프로'가 아니므로 경찰과의 대립과 충돌은 없지만, 평화의식이 매우 깊어지고 넓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안보 정책의 틀을 바꾸려는 아베 총리와 이를 반대하는 시민이 맞서는 구도가 상당 기간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여론의 변화에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5월 하순에 49.9%(교도통신 조사 기준)였던 아베 내각 지지율은 중의원 본회의에서 안보법안을 강행 처리한 직후 37.7%까지 추락했다.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에도 시민사회가 풀뿌리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학연구회 등 일본의 16개 역사 연구·교육 관련 단체는 올해 5월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는 그간의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서 실증돼 왔다"는 성명을 발표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시도에 일침을 놓았다.
'아이들과 교과서 전국네트워크 21' 등 시민단체는 우익 성향 교과서의 위험성을 알리고 채택을 막고자 서명 운동을 벌이는 등 땀을 쏟고 있다.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 발표가 임박하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등 일본 지식인 281명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가 중국, 한국 등 아시아 이웃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다시 표명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안보법안 강행 처리와 전후 70년 담화 논의 과정에서 집권 자민당 내에서도 불만이 고조하는 등 보수 정치권에서도 아베 총리의 제왕적 정치에 대한 비판이 있다.
보수 정치인의 대표적인 원로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97) 전 총리와 보수 성향의 요미우리 신문이 아베 총리에게 전후 70년 담화에서 침략을 인정하라고 촉구한 것에서 우려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베식 정치의 독주를 당장 멈추게 하기는 쉽지 않다.
비판이 높아지고 있지만, 정치 세력화하지 못해 현실 정치를 바꾸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타 씨는 "높아진 시민의 목소리를 정치에서 대변하고 국회에서 정부와 대결할 그 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오나가 다케시(翁長雄志) 오키나와(沖繩)현 지사가 미군 기지 정책에 대한 주민의 반대 의사를 수렴해 일본 정부와 전면 대결 자세를 취하는 것을 거론하며 "유일하게 싹이 존재하는 것이 오키나와"라고 논평했다.
자민당에는 다음달 당 총재 선거에서 아베 총리를 무투표로 재선하자는 기류가 벌써 일고 있다.
결국 아베 정치를 일본의 민심이 제대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는 내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나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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